수건

아무리 봐도 나의 독서 취향은 소설에는 약한 듯싶다. 장황한 묘사와 이리저리 끌고 가는 글의 구성과 전개를 따라가며 읽는 인내심이 부족해서다. 슬프게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는 생각에 현실적인 책 읽기에만 수십 년을 보낸 탓이라 변명을 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개인적인 내 생각으로는, 순수문학인 소설 장르는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에 접하는 게 바람직할 듯하다. 영혼이 맑고 순수한 시절, 삶에 찌들지 않아 투명한 시절 말이다. 너무 이른 나이에 살기에 급급해서 살아남기 위한 독서를 시작한 나는 문학을 즐기거나 매료되지는 못했다.

지금은 집 주변에 가로수길을 따라서 산책하며 찾아가는 도서관이 있으니 최고의 주거 환경이다. 언제든 나설 수 있는 산책로에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으니 행복한 곳이다. 원하는 신간이나 꼭 읽고 싶은 책이 없는 경우가 많은 게 흠이긴 하지만. 그래도 십만 권이상 소장하고 있으니 도서관 가까이 산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자 선물이다.

"인간엔 절대권력에 굴종하는 본능이 있다"... "우리는 독일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싸운 그들의 선조들과 같은 열성으로 자유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밖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유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14쪽, '자유로부터의 도피 중에서

과거 내 나이 20대 초반, 공무원 합격으로 첫 월급을 받고 감개무량했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드릴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한 집안의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책을 사서 볼 수 있어서 더 행복했다. 책값이 비쌌지만 망설이지 않고 사곤 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책 제목에 이끌려 샀다.

'자유'라는 단어가 주는 이끌림과 그 자유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도피' 라니! 아쉽게도 여러 번 읽기를 시도했었지만 끝내 다 읽지 못하고 책장에만 갇혀 있던 책이다. 수십 년 세월에 낡아진 이 책이 집안 어딘가에 꽂혀 있으리라.

이제 나이가 들어 세상과 삶의 경험이 쌓인 지금 다시 만나게 되니 깨닫는 게 많아서 반가웠다. 그래서 젊은 날 가장 먼저 알게 된 철학자가 에리히 프롬이다. <다시 읽는 명저> 속 첫 꼭지가 이 책이어서 더 반가웠다.

왜 사람들은 수많은 투쟁을 통해 가까스로 얻은 자유를 포기하고 전체주의에 열광하는 걸까. 인간은 자유를 쟁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불안과 고독을 느끼는 걸까. 프롬은 근대 민주주의 체제가 사회의 여러 제약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켰다고 여기지만, 개인은 또 다른 권위에 예속됐다고 봤다. -12~13쪽

사회주의의 심리학자, 귀스타브 르 봉은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이상은 실현불가능한 것이다. 역사적 경험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사회주의 정책으로 인해 사회가 파괴되고 난 다음에야 이런 경험들은 체득하는 경우가 많다. " -50쪽

프랑스의 군중심리학의 대가인 귀스타브 르 봉이 1896년 출간한 <사회주의의 심리학>에서 경고한 내용이다. 민주주의가 대중선동과 포퓰리즘으로 흐를 위험성은 있지만 사회주의의 위협을 막을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성공에는 관련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지만 사회 구성원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제도 개혁도 효과가 크지 않다. 유일하게 효과를 발휘하는 개혁이 있다면 교육개혁이다. 교육개혁을 통해 사회주의의 침투를 막고 '자유'와 '개인 책임'의 중요성을 국민 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그것만이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53쪽

메모 수준을 넘어서서 저장할 대목이 수십 군데에 이르는 책이라서 구입 목록에 올려 놓을 책을 만나서 기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읽겠다'던 내 용감한 도전이 내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하여 부끄럽지만, 앞으로 그 비율 정도는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다행이다.

이 책에는 고등학교 인문 시간이나 대학 교양 시간에 다루었을 수많은 명저들이 담겨 있다. 이천 년을 넘거나 수백 년 시간의 벽을 넘은 위대한 정신을 소유했던 인류의 지성들이 남긴 영혼의 목소리가 가득 실려있다. 고전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여준다.

4차 혁명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과 AI 시대를 향해가고 있는 현대의 정신세계를 앞지르는 일자천금이 넘치는 이 책은 일독이 아니리 두고두고 읽어야 할 명저가 분명하다. 후손에게 남겨줄 책의 목록에 넣고 싶은 책은 '위대한 정신' 그 자체라서 소중한 보물이다.

이 책은 공부하는 즐거움울 안겨준다. 101명의 현인이 쓴 명저들을 골라 한 권의 책에 담아낸 저자들의 면면도 대단한 분들이다.

50년 가까이 일한 덕분에 이제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아무런 제약 없이 (눈이 어두운 것과 어깨가 아파서 글을 쓰기 어려운 것만 빼고)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고 먹을 것에 탐닉하는 맛집 투어에도 관심이 없는, 누군가 보면 정말 재미없다고도 할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 책을 가까이 하는 동안에는 수건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예전엔 잘 읽지 않던 소설 읽기에 도전하는 마음이 설렌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 것이 '노벨문학상 '작품을 읽기 위한 워밍업과 이미 읽었던 명저들을 다시 찾아 읽는 시간을 가지는 중이다. 성공이나 연구 목적이 없으니 오로지 순수한 독서인이 되어 이만 권의 책을 읽었다는 이덕무처럼 '책만 보는 바보'로 사는 게 마지막 남은 인생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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